Cuba
쿠바(Cuba)



1 요약

cuba_flag.jpg

서인도제도에 있는 나라.
위치중앙 아메리카 카리브해상 서부
면적11만 861㎢
인구1129만 5000명(2003)
인구밀도101.9명/㎢(2003)
수도아바나
정체공화제
공용어에스파냐어
통화쿠바 페소(CUP)
환율21CUP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2,300$(2003)
나라꽃님파에아(수련의 일종)

2 본문

면적은 11만 861㎢, 인구는 1129만 5000명(2003), 인구밀도는 101.9명/㎢(2003)이다. 정식명칭은 쿠바 공화국(Republic of Cuba)이다. 수도는 아바나이고 공용어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쪽은 너비 약 300km의 플로리다해협을 사이에 두고 플로리다반도(半島), 북동쪽은 올드바하마해협(海峽)을 사이에 두고 바하마, 동쪽은 윈드워드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이티, 서쪽은 유카탄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카탄반도와 마주한다. 서인도제도에서 가장 큰 쿠바섬과 약 1,60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공산국가이다.

3 역사

콜럼버스가 쿠바섬을 발견한 것은 제1차 항해중인 1492년이었다. 당시에는 시보네족(族)·타이노족 등 5만여 명의 원주민들이 고도로 발달된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에스파냐인은 1511년 D.벨라스케스를 파견하여, 1514년에는 전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원주민들은 사금(砂金)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한 데다 1528년의 대(對)에스파냐 반란, 1530년의 악성 유행병 등으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렀다.

16세기 초부터 에스파냐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담배·사탕수수 재배에 종사시켜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였는데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더욱이 쿠바는 에스파냐와 아메리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에스파냐는 이곳을 총독령(總督領)으로 만들고 신대륙 경영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본국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으로 쿠바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권리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에스파냐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19세기 초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난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이 이곳에도 파급되어 1812년에는 아폰테의 지도 아래 대규모 흑인반란이 일어났다. 그후 노예제도 폐지, 농민혹사 금지와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1868∼1878년의 ‘10년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독립전쟁 기간 중 공화제 헌법이 공포되고 데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었으나, 1878년 정치·경제의 개혁과 노예해방을 약속한 ‘산혼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1895년 쿠바 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어 1898년 아바나항(港)에 정박 중인 미국 선박 메인호(號)에서 원인 모를 폭파사건이 일어나 미국은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 전쟁에 개입하였다.

그 결과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에스파냐는 쿠바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1년 공화제 헌법 제정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 설치를 인정하는 ‘플래트 수정조항(修正條項)’이 추가되어 1903년부터 1999년을 예정으로 관타나모만(灣) 등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설치되었다. 미국의 군정 종결과 함께 1902년 5월 E.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양질의 토지, 사탕산업, 교통수단 등 쿠바 경제의 중추적 기능은 미국자본이 장악하였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수뢰(收賂)·부패·실정(失政)·무책임으로 상징되는 고메스(재임 1909~1913) 정권에 이어 가르시아(1913~1921), 사야스(1921~1925), 마차도(1925~1933),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1934~1944, 1952~1959), 마르틴(1944~1948)의 독재·부패 정치가 계속되었고 1912년에는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3,000여 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한 마차도와, 1933년 쿠데타로 마차도 정권을 전복시킨 바티스타는
속임수·군대·암살을 통하여 권력을 유지한 인물로 악명이 높다. 더욱이 1933년 직접·간접으로 쿠바의 정치를 좌우해온 바티스타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쿠데타로 취소된 1952년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산티아고의 몬카타요새(要塞)를 공격하여 이른바 7·26운동이라고도 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1955년 감옥에서 풀려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정부 전복을 준비하는 한편 이듬해에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였다. 이후 마에스트라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인 끝에 1959년 1월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카스트로는 그해 5월 농지개혁법을 발표하고 대지주의 토지와 미국계 기업의 대농원을 몰수하였다. 1959년의 석유법, 1960년의 대기업 국유화법으로 미국계의 사탕·석유회사를 접수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여 미국과 대립하다가 1961년 1월에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미국 기업인들의 지원을 받은 망명 쿠바인들이 쿠바로 진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소련 중거리 미사일의 쿠바 반입과 미국의 쿠바 해상 봉쇄로 인한 쿠바 위기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같은 해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에서 개최된 미주기구(OAS)의 외상회의에서 축출된 데 이어, 1964년 회의에서는 대(對)쿠바 경제봉쇄강화조치가 결정되어 멕시코를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칠레에 아옌데의 좌경정권이 등장하자 칠레와 복교한 후 1973년까지 페루·가이아나·자메이카·트리니다드토바고·바베이도스·아르헨티나와 국교를 회복하였고, 미국과는 1973년 2월 항공기 공중납치 방지협정을 체결하였다. 1994년에는 이민 협의를 체결하였으나 1996년 쿠바의 미국 민간기 격추사건으로 관계가 냉각되었다가 1999년과 2000년에 미국이 대(對)쿠바 경제제재를 일부 완화하였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는 소련과 연합하여 아프리카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80년 5월에는 바하마를 침공하였고, 1981년에는 니카라과·엘살바도르의 좌익 게릴라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등 카리브 해역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미국과는 1980년 4월 지미 카터 대통령 때 처음으로 화해조치가 취해졌고, 1981년 12월 양국간의 긴장해소를 위한 회담이 열렸다. 1982년에는 소련으로부터 10억 달러 상당의 군사장비인 SA3 지대공(地對空) 미사일 140기를 제공받는 등 이후로도 소련과 경제적·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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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이런 놈입니다.

격언> 평범한 사람이 비상한 결의로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져서가 아니라,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몽테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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